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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과 함께 떠나요] 구산 성지, 남한산성 16.10.24
  • 남한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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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과 함께 떠나요] 구산 성지, 남한산성
 
한강변 한폭의 그림같은 성지서 오붓한 휴식과 신앙의 평화 만끽
 
 
구산성지
 
맑고 푸른 가을 하늘이 눈부신 9월, 모처럼 쉬는 주말에 집에만 있기에는 날씨가 너무 아깝다. 무턱대고 여행을 나서자니 지옥 같은 교통체증이 부담스럽다. 서울과 가까이 있으면서도 오붓한 휴식과 신앙의 평화로움을 만끽할 수 있는 그런 곳은 없을까?
 
서울에서 한강을 끼고 올림픽대로를 달리다가 중부고속도로와 만나는 강일인터체인지에서 5분만 더 가면 만날 수 있는 구산성지가 바로 그런 곳이다. 구산을 잘 모른다 해도 카페촌과 조정경기장으로 유명한 ‘미사리’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구산은 미사리 조정경기장 길목에 자리잡은 한폭의 그림 같은 성지다.
 
동네 뒷산이 거북이를 닮았다고 '거북구(龜)'와 '뫼산(山)'자를 써 구산이라 불리는 이곳은 103위 순교성인 가운데 한분인 김성우(1795∼1841년·안토니오)성인이 태어나 공소회장을 지내며 교우촌을 일구었던 곳.
 
지금은 성인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특히 구산은 김성우 성인의 후손들이 대대로 살면서 성인과 함께 순교했던 많은 치명자들의 묘소를 잘 보존하고 있어 박해시대의 자취가 원형대로 남아있는 곳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1830년께 두 동생과 함께 영세한 김성우는 한동안 유방제 신부를 모시고 회장직을 수행하며 온 마을에 복음을 전했다. 또 모방 신부에게 우리 말과 풍습을 가르치기도 했던 그는 1839년 기해박해 당시 천주학의 괴수로 지목돼 한양으로 압송된다.
 
그가 자신에게 고문을 가하며 배교를 강요하는 재판관에게 한 말은 지금도 신앙의 명언으로 남아 있다.
“나는 천주교인이오. 살아도 천주교인으로 살고 죽어도 천주교인으로 죽을 따름이오.”
 
그는 옥에 갇힌 지 2년 만에 결국 교수형으로 순교했고, 그의 유해는 후손들에 의해 비밀리에 거두어져 이곳 구산성지에 안장됐다.
 
구산성지를 찾는 순례객을 맨 먼저 맞이하는 것은 1500평의 넓은 잔디정원과 서너개의 돌계단을 올라 도드라진 둔덕 위에 세워진 성모자상이다. 이 모자상은 지난 83년 이곳 초대 주임을 역임했던 고 길홍균 신부가 꿈 속에서 본 성모님 모습 그대로 고 김세중(서울미대 학장 역임)화백이 제작한 것.
 
성모자상 오른쪽으로는 성인의 묘소와 성당으로 통하는 자그마한 기와 대문이 눈에 들어온다. 숙연한 마음으로 문에 들어서면 묘소 주위로 청동빛의 고색창연한 14처가 순례객을 맞는다. 굽이굽이 말려 올라간 소나무들의 푸른 빛이 십자가를 진 예수를 향해 시퍼런 날을 겨누는 병사들의 창과 어우러져 있다. 차가운 푸른 빛은 처절했던 순교 당시의 고통을 증언하는 듯하다.
 
구산성지가 아름답고 평화로운 성지로 소문나 순례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데에는 김기창 주임신부의 정성스런 미사가 큰 몫을 하고 있다. 월요일을 제외하고 매일 오전 11시에 봉헌되는 미사는 영명축일을 맞이한 사람들의 잔칫날. 지난 한달 사이에 축일을 맞은 사람들을 한사람씩 불러내 소개하고 선물을 주는 이곳 미사는 평일의 성지 미사임에도 불구하고 발 디딜 틈 없이 붐빈다. 특히 결혼기념일을 맞이한 부부가 미사에 참례하면 평생 잊지 못할 축하 잔치를 열어준다는 것이 김 신부의 귀띔. 결혼기념일을 맞는 부부는 한번 꼭 방문해 보기를 권한다. 문의 : (031)792-8540.
 

남한산성
 
서울과 성남시 사이 남한산 자락에 자리잡은 남한산성은 편리한 교통과 수려한 경관으로 등산객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산성내 중간쯤에 위치한 사거리까지 널찍한 도로가 열리고 자가용은 물론 좌석버스가 운행되면서부터는 평일 아침에도 가벼운 차림으로 산을 찾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신자를 포함해 남한산성을 다녀가는 사람들 중에 오직 천주를 섬긴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수많은 신앙 선조들이 이곳에서 순교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남한산성은 기해박해와 병인박해(1866년) 당시 광주, 용인, 이천 등지에서 잡혀온 교우들이 치명한 순교터.
 
남한산성으로 들어가는 길은 성남 방면에서 오르는 남문과 광주 방면으로 오르는 동문으로 나뉘는데, 순교터는 동문 바로 옆에 있다. 육중한 동문을 지나 몇 걸음을 옮기면 오른쪽 도랑 옆으로 ‘천주교 순교 성지’라고 쓰인 녹슨 철제 표말 하나가 순교터임을 알려준다. 여기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이곳은 서기 1791년 신해, 1801년 신유, 1839년 기해, 1866년 병인 네 차례에 걸쳐 한덕운, 김덕심, 정은 등을 위시하여 70명 이상(실순교자 200∼300명으로 추산) 순교한 곳임.”
 
순교성지의 이정표를 보면 바로 이곳이 삶과 죽음의 갈림길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신앙 선조들은 바로 앞의 동문을 통해 이곳으로 끌려와 혹독한 고문 끝에 결국 주검이 되어 성 밖으로 던져진 것이다. 살았을 때는 동문으로 들어왔지만 죽은 시체는 성 밑에 파 놓은 수구문(水口門)을 통해 내팽겨쳐 졌다. 이때 수구문은 시구문(屍口門)이 됐고 흘러내리던 물도 핏물이 됐으며, 동문 밖 계곡에는 시신이 쌓였다. 시구문은 동문 안에서 바라볼 때 왼쪽 길 바로 밑에 깊숙이 자리잡고 있다.
 
경기도립공원인 남한산성에는 경기도 유형 문화재로 지정된 수어장대, 숭열전, 연무관 등이 비극의 병자호란을 말없이 증언하고 있다. 이들과 함께 성내 9개 절 가운데 유일하게 남아있는 장경사와 병자호란 기록화 전시장 등도 둘러볼 만하다.
 
 
성지 인근의 명소 - 미사리와 암사동 선사주거지
 
올림픽대로를 타고 구산성지에 갈 때 천호대교를 막 지나면 오른쪽으로 암사동 선사주거지 표말이 나온다. 표말을 따라 내려가면 5분내에 도착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우리나라 신석기시대 최대의 집단 거주지인 암사동 선사주거지.
 
이곳에는 6000여년 전 신석기시대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그대로 재현한 움집과 그 자리에서 출토된 각종 유물을 전시한 전시관 등이 있어 당시의 생활상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특히 이곳은 전시장이 숲속에 파묻혀 있다고 할 만큼 너른 공원이어서 느긋하게 산책하기에도 제격인 장소다.
 
구산성지와 붙어 있다시피 한 곳이 바로 미사리 조정경기장. 43만평의 대지와 10만평의 호수가 함께 어우러진 이곳은 88년 서울올림픽 경기가 열렸던 역사적인 장소로, 휴식을 위한 제반 시설을 갖췄다. 넓은 녹지와 산책로, 조깅 코스 등이 잘 가꾸어져 있으며 특히 가족이나 단체의 체육행사, 야유회 장소로도 알맞은 체육 및 놀이시설이 완비돼 있다. 너른 잔디밭에서 탁 트인 호수를 내려다보며 심신의 찌든 때를 씻어내기에 충분한 휴식공간이 바로 이곳이다.
 
 
찾아가는 길
 
구산성지 : 올림픽대로와 중부고속도로가 만나는 강일인터체인지에서 미사리 조정경기장 방향으로 1㎞ 정도만 지나면 성지안내 표말이 나온다. 거기에서 2㎞만 더 가면 된다.
 
대중교통 : 전철 강변역과 상일역에서 강일동행 버스를 이용할 수 있지만 불편하다. 대신 매일(주일과 월요일 제외) 오전 10시30분 지하철 5호선 상일역에서 성지로 출발하는 봉고차량을 이용할 수 있다.
 
남한산성 : 미사리에서 광주행 43번 국도를 타고 20분쯤 가면 남한산성 입구(동문) 표말이 보인다. 성남시쪽에서 남문을 통해 올라갈 수도 있다.
 
대중교통 :서울 동서울터미널에서 15-1번 버스와 분당에서 출발하는 9번 버스가 있다.
 
[평화신문, 2000년 9월 24일, 남정률 기자]